동학농민전쟁과정에서 나타난 장성전투의 의미에 관한 고찰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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작성일 23-12-14 03:57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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황현은 무덤 하나에 4~5명씩 17개를 만들었다고 하였다.동학농민전쟁과정에서나타난장성전투의의미에관한고찰 , 동학농민전쟁과정에서 나타난 장성전투의 의미에 관한 고찰기타레포트 ,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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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학승을 영웅시하는 모습이다. 홍계훈은 대포 한방에 수백명이 죽었다고 하였다.
동학농민전쟁과정에서 나타난 장성전투의 의미에 관한 고찰에 대한 글입니다.”고 하였고, 황현은 대환포 2좌를 빼앗았다고 하였고 오지영은 대포 3문과 양총 백여개를 빼앗았다고 하였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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다. 전봉준은 공초에서 처음 대포를 쏠적에 50여명이 죽었다고 했다. 그러나 전봉준 공초세는 관군의 죽은 숫자를 말하지 않고 있다아
이로 보아 관군측에서는 향병이 주로 앞장을 서서 많은 희생자를 냈는데, 홍계훈은 이 사실을 중앙에 거짓으로 보고하였다고 판단된다 그는 처음부터 향병의 참여사실을 보고하지 않고 있었다.
또 이때 농민군은 전리품을 노획했는데 홍계훈은 “크루프포 1좌, 회선포 1좌, 탄환 얼마쯤을 잃었다.동학농민전쟁과정에서 나타난 장성전투의 의미에 관한 고찰



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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관군측의 희생자는 다음과 같다.
그러면, 이때 양측의 희생자는 어떤 규모였던가?
농민군측의 희생자는 다음과 같다. 황현은 관군 7명이 죽었다고 하였으며 홍계훈은 이학승을 비롯하여 병정 5명이 죽었다고 하였으며 이선근은 日本(일본)측 를 토대로 지방군 3백여명에 경군 12명이 죽었다고 하였다.